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A. 가필드 (문단 편집) === 짧은 대통령 재임 시절과 암살 === 대통령이 된 가필드는 부패한 공직자를 일소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조사하도록 명했다. 당시에는 대통령이나 선거에서 승리를 쟁취한 정당이 승리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행정부 관직을 주는 [[엽관제]]가 성행했다. 가필드는 콩클링 파벌의 협력을 받았고, 그 대가로 엽관제에 따라 콩클링 파벌에게 관직이 배분되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부패로 이름을 날렸던 콩클링 파벌에게 관직을 줘버리면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은 물론 부패 척결도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결국 가필드는 콩클링 파벌에 관직 준다는 약속을 깼다. 물론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콩클링 파벌은 가필드에게 크게 반발했다. [[파일:6.제임스_가필드_대통령_저격_사건_묘사_그림.jpg]]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 저격 사건 묘사 그림 그러던 중 7월 2일 워싱턴의 볼티모어 포토맥 역 앞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찰스 J. 기토의 총격을 받았다. 기토는 콩클링 파벌 사람으로서 관직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 불만을 품고 암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기토는 가필드를 지지하는 연설을 작성하고 연설문을 공화당 전당대회에 배부하는 등 가필드를 지지해왔다. 그는 자신이 가필드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고 --망상--생각하면서, 가필드가 당선되자 파리 주재 미국 공사직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대선 승리에 대한 기토의 기여도는 미미했고, 가필드와 그의 내각은 기토를 무시했다. 정신병 증세가 있던 기토는 백악관에 계속 드나들거나 대통령을 스토킹하며 끈질기게 공직을 요구하고, 결국 백악관 출입 금지를 당했다. 끝내 기토는 자신이 공직에 오르려면 콩클링 파벌 인물인 부통령 아서가 대통령이 되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암살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암살 며칠 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일은 공화당을 단결시킬 것이고, 나아가 미합중국을 구원할 것이다. 난 대통령에 대한 악의는 없지만 죽음은 정치적으로 필요하다." 기토는 15달러[* 2020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400달러 정도 된다.]를 빌려서 암살 도구로 사용할 [[권총]]을 구입하러 나갔다. 기토는 워싱턴에 있는 한 총포상에서 [[https://en.wikipedia.org/wiki/.442_Webley|.442구경 웨블리 탄환]]을 쓰는 [[https://en.wikipedia.org/wiki/British_Bull_Dog_revolver|브리티시 불독 리볼버]]를 구입했다. 현대 기준으로도 [[.44 Magnum]]탄과 구경이 거의 비슷한 대구경 탄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대통령을 확실하게 죽이려면 총알이 클 수록 좋다고 믿어서였다. 그리고 총은 원래 상아 손잡이가 달린 것을 구입하려 했는데, 금액이 부족해서 목재 손잡이로 만족해야 했다. 상아 손잡이를 선호한 것은 그래야 나중에 박물관에 전시될 때 더욱 돋보일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셈. 기토는 권총을 숨기고 역에서 가필드를 기다렸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경호원 없이 다니는 일이 많았고, 특히 가필드는 이 때 여름 휴가를 떠나려고 가족과 함께 기차역으로 온 것이라 경호 인력은 전무했다. 가필드가 역 안으로 들어서자 기토는 가필드를 향해 두 발을 발사했고, 두 발 모두 명중했다. 기토는 가필드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서 곧바로 현장을 떠나려고 했는데, 총소리를 듣고 들어오던 경관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 기토는 '''"대통령은 죽었다! 이제 부통령 [[체스터 A. 아서|아서]]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크게 외쳤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아서는 자신을 끌어들인데 대해 크게 분노했고 기토를 비난했다. 특이하게도 이 이야기에 대해 직접 변명하지는 않아서 가필드의 암살 배후에 아서가 있다는 소문도 제법 나돌았다. 다만, 이 민감한 문제 때문에 아서는 가필드가 살아있는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직무수행을 거부했다. 어쨌든 가필드는 등에 두 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졌는데, 다행히 그 자리에서 바로 죽지는 않았고 2개월 조금 넘게 병석에서 버텼지만, 의사들은 가필드 몸의 총알을 끝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발명한 [[금속탐지기]]도 사용했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사실 그가 맞은 총알 한 발은 팔을 스쳤고 다른 한 발은 등쪽의 [[늑골]]을 부순 뒤 [[척추]]를 관통하여 [[췌장]] 뒤쪽에 박혔다. 위치상으로는 복부 쪽이 가까웠지만 주치의 블리스 박사는 엉뚱하게도 등쪽에서 총알을 찾으려 했다. 심지어 소독하지도 않은 손으로 상처부위를 찔러댔다. 결국 9월 19일에 [[패혈증]]까지 겹치면서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50세. 죽기 며칠 전에 의사들이 가필드를 뉴저지주 엘버론의 바다 휴양지로 이동할 것을 권유했는데, 이때 너무 무리하게 이동하는 바람에 오히려 가필드의 병세를 키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백악관까지 전용 철도를 깔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향수였던 매딜럼과 음식 튜브, 나무로 제작한 [[에어컨]][* 당연히 현대식 에어컨은 아니였고,(20여년 뒤에 발명) 인공 제빙기술이 먼저 발명되면서 얼음을 나무통에 담아서 찬 바람을 발생시키는 방식이었다. 원리 자체는 [[냉풍기]]에 가깝다.]을 치료법으로 사용했다고. 이건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게 엉뚱하게 전해지기도 했는데, 당시 의료수준이 나빠서 소독도 안한 의료기구로 그를 수술해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실은 [[2000년대]]까지 팔리던 미국 대통령에 대한 국내 저서에서 가필드가 죽은 원인으로 나올 정도. 물론 소독 미흡으로 인한 패혈증이 생긴 것은 맞지만 아예 소독도 안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을 암살한 기토는 당연히 경호원들한테 붙잡힌 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대통령이 된 아서가 자신을 사면해줄 것으로 망상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후 그의 시신은 의료기관으로 넘겨져 해부 실험 대상이 된다. 지금도 그의 뼈와 뇌를 보관중인 병원이 있는데, 암살자의 뼈는 여러 상징적 의미가 있어 보통은 붙이는 꼬리표조차 달지 않으며 현재도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또한 뇌는 단면을 보면 그 사람이 미친 줄 알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의사들에 의해 아주 조각조각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해부 도중 두개골이 사라졌는데, 이 행방은 1912년 워싱턴 포스트에서 도난당했다는 기사가 나온 이후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암살에 사용한 리볼버는 기토의 소원대로 20세기 초까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지만 이후 분실되었다. [[율리시스 S. 그랜트]]는 가필드를 "지렁이 뼈대도 가지지 않은 자"라고 혹평했다. 이건 그랜트가 가필드에게 자기 계열 사람들을 중용하라고 청탁을 했지만 가필드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이에 앙심을 품고 내뱉은 말이다.[* 다만 그랜트 역시도 자신의 부패한 측근들을 그럴리가 없다며 믿었다가 말아먹었기 때문에 옳은 소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전임 대통령인 [[러더퍼드 B. 헤이스]]는 "미합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가난하게 출발해서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벤자민 프랭클린]]도 링컨도 그와 같지 않았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일반적으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엽관제도의 희생양으로 죽어간 비운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대통령 편에서는 콩클링과의 타협 때문에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고 소개했지만, 그보다는 엽관제도의 희생자로서 행정학 계열에서 많이 다뤄진다. [[미국 대통령]]으로써 활동한 기간이 4개월[* 공식적인 재임 기간은 6개월이나 두 달을 총격 후유증에 시달린지라 실질적으로는 4개월.] 밖에 되지 않아서 업적을 평가하기가 어렵다. 근데 비슷하게 임기가 짧은 편인 다른 대통령과 비교하면 고작 1달 재임한 윌리엄 해리슨이 최하위권을 면치 못하고 2년을 겨우 넘긴 재커리 테일러가 중하위권~하위권 사이에서 폭락이 심한 것과는 달리 의외로 가필드는 평범하게(?) 중하위권 정도에 머무는 편이다. 가필드의 암살은 엽관제도의 심각한 부패성과 비능률 등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오늘날의 공무원 시험의 기초를 놓은 펜들턴 법이 나오고, 엽관제도의 폐해를 막아내고자 정치와 공직을 분리하려는 정치행정이원론이 등장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